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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나이 키 프로필 콘서트 예매방법 학력 가족 열애 아내 결혼 과거 논란 자녀

코코미. 발행일 :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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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 프로필 나이

 

본명  최홍기

생일 1947년 2월 11일 (76세?)

출생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중로 66

국적 대한민국

본관 경주 최씨

 

신체사이즈 

키 175cm

체중 71kg

 

나훈아

 

가족사항  

가족 어머니,

슬하 1남 1녀,

사촌동생 나진기

 

 

학력사항  

초량국민학교 (졸업)

부산 대동중학교 (졸업)

서라벌예술고등학교 (졸업)

 

병역 공군 병장 만기전역

데뷔 1968년 내 사랑

 

 

나훈아 이야기


나훈아는 대한민국의 가수로 활동중이다.

트로트 보컬로 주로 유명세를 탔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직접 작곡해서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이며,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래방 반주기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다.

 

오빠부대, 요즘은 빠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많았던 인기 가수였다. 

전성기 시절에도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2020년대인 현재에도 트로트 가수 인기순위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정말 많다. 

 

2008년 기자회견 후 잠적. 11년만에 복귀하여 2017년 하반기 본격적으로 공연을 시작하였다. 현재 다시 성인가요 시장의 불을 지폈다.

 

 2020년 KBS에서 진행한 콘서트 준비를 하며 본인이 데뷔 54년 가수 생활이라고 언급 한 것을 보아 본인은 1966년 데뷔를 확실시 하는 듯.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이자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로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가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어 나훈아는 히트곡의 숫자에서도 국내 최다는 물론이고, 앨범 발표수만 해도 무려 200장 이상, 800곡 이상의 자작곡을 포함해서 2,600곡 정도의 취입곡을 자랑한다.

 

이처럼 나훈아는 트로트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별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가수다.

1947년생으로 익히 알려져 있으나 어린 시절에 데뷔한 것으로 인해 험한 연예계에서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올린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1947년생이 아니라고 한다.

 

남진도 조용필을 통해 나훈아의 나이를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 한 적이 있으며 1960~1970년대 LP들에서 나이를 소개할 때 1950년, 1951년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호적상에는 1951년생이다.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전매특허인 꺾기로 대표되는 나훈아 특유의 창법은 가요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으며, 수많은 가짜 나훈아를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달리 나훈아의 노래는 가수가 자기만의 색을 입혀서 노래하는 것이 엄청나게 부담되는 노래로 유명한데, 나훈아의 노래를 소화하다보면 자칫하면 어설픈 모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나훈아의 창법은 엄청나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히트곡이 본인이 작사하고 작곡한 곡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 의해 작곡된 히트곡도 꽤 많다. 일례로 2005년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 같은 곡은 의외로 나훈아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았다. 

"행운", "남자라 울지 못했다" 등. 자작곡 중 다른 가수에게 준 곡도 있는데 이중에서 유명한 노래로는 <땡벌>(강진이 부름)이 있다. 사실 "땡벌"은 나훈아가 1987년에 이미 직접 불러서 발표했었다. 


또한 1991년에 원로가수 정원이 "인생은 본전"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만 바꿔서 불렀다. 

 

나훈아는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잘 주는 편은 아니다. 땡벌 외에는 이자연이 부른 "당신의 의미",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등이 대표적인 곡이다. 자작곡 전반을 보면 평생에 걸쳐 블루스와 민요를 트로트에 접목한 형태의 음악적 시도를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가창력 만큼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장점은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무대 장악력과 무대 연출능력을 꼽을 수 있다.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자기가 작사 또는 작곡한 노래이고 작사와 작곡을 다 한 노래를 부를 때는 양 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한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부터 라이벌로 경쟁했고, 두 사람의 팬덤도 갈라져 있었다. 마침 언론 및 대중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차이점들이 여럿 있었다.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투박했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노래의 성격 역시 남진은 도시의 세련된 이미지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한 반면 나훈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나 시골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조차 대조적이어서 나훈아는 부산 출신의 서민 집안이지만 남진은 전남 목포 출신의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다. 


사실 나훈아 집안도 이미지만큼 가난한 집안은 아니었고,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어서 외국에서 사온 축음기도 가지고 있는 등 제법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이었다. 

 

그래도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던 남진 집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씨는 곡물 정미회사, 언론사 등을 경영한 기업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도 지냈던 인사였다.

 

 남진의 회고에 따르면 한 때 전라남도 전체에 개인 자가용이 두 대 있었는데 하나는 전남도지사를 위한 전남도청 것, 하나는 아버지 김문옥(정치인)씨 것이었다고.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만들어져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치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멱따는 소리 치워라'라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80년대 칼럼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남진이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부각되며 라이벌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예술적인 곡을 많이 작곡, 작사를 한 나훈아는 가수, 예술가로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다.


남진 콘서트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은 발매를 개시하자마자 10초도 안 되어서 동나기 때문에 콘서트 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방탄소년단, 이승환, 한국시리즈 7차전, 빅뱅, 명절 전 일반 열차, LCK 결승전 급으로 티켓 예매하기 어려우며, 아들 딸 전부 동원해서 예매를 해도 성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것은 활동노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는 극도의 신비주의로 신곡을 발표하는 텀도 길게 두고,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다. 방송 출연도 거의 하지 않는다. 반면 남진은 가요 프로그램이나 예능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등 트로트 가수치고는 다작하는 편이다.

 남진의 팬 입장에서는 '반드시 콘서트에 가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가수로서의 각자의 철학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나훈아는 '저 하늘 위의 별'로서 본인을 포지셔닝한 반면 남진은 어디까지나 '대중의 친구'를 지향했다. 

외모와 같은 외적 이미지조차도 이를 따라갔는데 남진은 친근하고 편안한 아저씨의 이미지로 바뀐 반면 나훈아는 카리스마 있는 미중년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아이돌 가요계에 비유하면 코어팬덤형 아이돌과 대중형 아이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맞고 틀린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가진 가수로서의 가치관이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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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었기 때문에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195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온 축음기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 덕에 형과 더불어 부산에서 서울의 서라벌예술고등학교로 유학을 올 수 있었다.

여기서 보듯 원래는 성악가를 목표로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곡가 심형섭이 오아시스 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에게 소개해줬고, 그가 LP판을 무료로 녹음시켜주겠다고 하면서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래 중학교 때까지만해도 공부를 잘했던 그가 의사나 판검사 같은 엘리트 직업을 갖기를 바랬던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나훈아의 재능을 크게 사서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 그 덕분에 현재도 나훈아는 서예에 능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인 사이를 유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 평했다. 

김지미도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라고 평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질 당시 그녀에게 수천만 원의 돈을 건넸는데 "여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엔 이혼한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이긴 했지만 나훈아의 군자다운 면모가 보이는 일화. 


한편으로 김지미와 나훈아의 혼인이 화목했던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으며, 김지미는 주위에 간혹 나훈아와의 혼인이 조금 후회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말한 적도 있다. 

원래 둘은 평범하게 식당을 경영하면서 살고 싶어했지만 나훈아가 가수로 복귀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한다.

김지미와 이혼 후 가수 정수경과 동거를 하다 첫째 아들을 얻었고 1983년 연말에 3번째 결혼을 한다.


 1988년 둘째 딸이 태어났으며, 정수경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1993년 하와이로 거처를 옮기며 나훈아는 기러기 아빠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아들의 결혼식에 나훈아가 불참한 이후로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2008년에 일본 야쿠자와 여배우 K를 놓고 시비가 붙어 고자되기를 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헛소문이 너무 돌자 이런저런 의혹에 답변하고자 1시간짜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말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기자회견을 어느 정도 진행하다가 "제가 지금부터 이 위에 올라가서,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 자리에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서는 "자, 지금 여러분들 중에서 대표로 얘기해 주십시오.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하며 원한다면 아예 바지를 벗어 증명하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것. 

 

당연히 기자회견장은 그가 단상에 올라갈 때부터 술렁이고 셔터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 때 나훈아의 팬들이 나훈아를 굳게 믿는다고 외쳐서 진짜 바지를 내리지는 않고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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